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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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설재서원(雪齋書院)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649
   정가신(鄭可臣) 정 식(鄭 軾) 신 장(申 檣) 정 심(鄭 諶) 정 상(鄭 詳) 정여린(鄭如麟) 정 란(鄭 瀾) 정 초(鄭 初) 정 눌(鄭 訥)
   1688년(숙종 14)
   
   9월 25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93호(1984.02.29지정)
설재서원은 문정공 설재 정가신(雪齋 鄭可臣)을 배향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금안동에 세워졌다.(≪書院可攷≫1688년 창건,≪설재서원지≫<문정공설재정선생유허비> 및 ≪典故大方≫에는 1693년(숙종 19)에 창건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693년(숙종19) 설재선생의 5세손으로 세종대 효자정려를 받은 경무공(景武公) 영모정(永慕亭) 정식(鄭軾)이 추배되었다.
그 후 1712년(숙종 38) 여름에 향사우(鄕祠宇)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 이 때 서울 유림 33인이 도내에 통문을 보내 심단(沈壇)을 원장으로 추대하고, 서원을 노안면 금안동에서 영평리 영안마을로 이건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가1723년 설재서원 이건(移建), 6위 배향. 배향인물의 행적에는 신장이 1713년 추배, 정심은 1786년에 추배된 것으로 각기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한편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1900년 영모재(永慕齋)만을 복원하여 제향하였다. 1953년 훼철된 지 85년 만에 사론(士論)이 제기되어 서원이 복설되었다. 이때 초동 팔문관의 한 분인 창주공 정상(滄洲公 鄭詳), 경원공 정여린(慶源公 鄭如麟), 죽우당 정란(竹友堂 鄭瀾)을 추배하고 1988년 삼불의헌공 정초(三不義軒公 鄭初), 묵재공 정눌(墨齋公 鄭訥)등이 추배되어 현재에 이른다.

1)주벽-정가신(鄭可臣, ?∼129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초명은 흥(興). 자는 헌지(獻之). 향공진사(鄕貢進士) 송수(松壽)의 아들이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개경에 왔으나, 의지할 곳이 없다가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여러 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1280년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세자의 스승으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했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1294년에는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을 통해 고려가 귀부한 연월(年月)을 물어오자 그가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郎舍)와 금내육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해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다.
1298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에 한 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별세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해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法度)가 있어 국인(國人)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있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대부(大夫)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大官)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書生)과 같았다고 한다.
고려 호경대왕(虎景大王 : 고려 태조의 5대조로 추정됨.)부터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인 ≪금경록 金鏡錄≫을 찬집하였다.그 밖에 많은 사령(辭令)을 지었다.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2)정식(鄭軾, 1407∼146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빙보(憑甫). 가신(可臣)의 6세손이며, 문진(文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수(思修)이고, 아버지는 자신(自新)이며, 어머니는 최사위(崔士威)의 딸이다. 이극근(李克勤)의 문인이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持平)·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1443년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함길도에 심한 기근이 들자, 경차관(敬差官)으로서 도를 순시하고 돌아와 조정에 상황을 보고한 뒤 간신들의 농간으로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또한, 1445년 이조정랑 때에도 낭청 연회 문제로 다시 삭직 당하였다.
1446년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자 국장도감판관(國葬都監判官)이 되어 능실의 제도를 맡아보았으며, 그 이후 의정부검상과 사인을 지냈다. 1450년 정이한(鄭而漢)의 종사관으로 의주성 축성을 감독했고, 1453년(단종 1)에는 지사간원사로 발탁되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으로 봉해졌으며, 1458년에는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460년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곧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다시 함길도관찰사로 전천(轉遷)되었다. 1461년 겸 함흥부윤이 되었을 당시 모련위(毛憐衛) 야인을 정벌할 때 그가 병기의 조달을 모두 관장하여 창졸간에 판비(辦備)하였다. 또, 따로 군사 1,000기(騎)를 거느리고 아치랑귀(阿赤郎貴)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돌아왔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초자(超資)되었다.
1462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곧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판한성부사로서 수장(守將)이 되었다. 1463년 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1465년에는 경상·전라도군적사(慶尙全羅道軍籍使)가 되었다가 곧 의금부제조가 되었으며, 1466년 동지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와 군적 정리에 많은 공을 세웠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3)신장(申檣, 1382∼14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제부(濟夫), 호는 암헌(巖軒). 사경(思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전의판서(典儀判書) 덕린(德隣)이고, 아버지는 고려 공조참의 포시(包翅)이며, 어머니는 김충한(金忠漢)의 딸이다. 아들에 숙주(叔舟)·말주(末舟)가 있다. 어머니는 함주지사(咸州知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상서녹사(尙書錄事)가 되었다. 다음 예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춘추관동지사로서 ≪정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군도총부총제(中軍都總府總制)·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공조좌참판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래 대제학을 맡아 당시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4)정심(鄭諶, 1520~1602)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실(仲實), 호는 일헌(逸軒)이다. 아버지는 정염조(鄭念祖)이며 조부는 정관(鄭觀), 증조부는 정승현(鄭承賢)이다. 1552(명종 7) 식년(式年)에 진사(進士)를 3등으로 합격하고 1568년(선조 1)에는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이조정랑을 지냈다. 나주의 설재서원에 배향되었다.
 
5)정상(鄭詳)
자(字)는 중신(仲愼), 호(號)는 창주(滄州), 본관은 나주(羅州), 설재 가신(雪齋 可臣)의 후손, 병판(兵判) 식(軾)의 현손이다.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고 선조 7년에 문과에 급제 하여 남평(南平) 서천군수(舒川郡守)와 정랑(正郞)을 역임(歷任)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병든 몸으로 이충무공순신(李忠武公舜臣)을 따라 정운(鄭運) 송희입(宋希立)등과 함께 종사하고 한산(閑山)싸움에 병으로 인하여 귀가하여 아들 여린(如麟) 종손(從孫) 란(瀾)을 시켜 쌀을 이순신(李舜臣)의 군진(軍陣)에 보냈다.
 
6)정여린(鄭如麟)
자는 경후(景厚), 본관은 나주(羅州), 문정공(文靖公) 가신(可臣)의 후손, 군수(郡守) 상(詳)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에 군량을 실어 수사(水使) 이억기(李億祺)의 군에 공급하고 동왕 27년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을 도와 7명을 참살하고 이원익(李元翼)을 따라 부산(釜山)에서 전공을 세워 승전도(勝戰圖)가 하사되었다. 광해(光海) 때 상소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에 반대하고 인조 2년 이괄의 난에 거의(擧義)하여 공주(公州)에서 왕을 후위하고 구장(鳩杖)과 갑주(甲冑)의 상사(賞賜)를 받았다. 이듬해 방어사(防禦使)로서 모문용(毛文龍)에게 글을 보내어 몰아냈기에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임명되었다. 나주(羅州)의 설재서원(雪齋書院)에 향사(享祀)했다.
 
7)정란(鄭瀾, 1583~1656)
본관은 나주이고 호는 죽우당(竹友堂)이다. 나주의 설재서원에 배향되었다.
 
8)정초(鄭初, 1344~1423)
정가신(鄭可臣)의 증손으로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하여 집현전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 (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9)정눌(鄭訥)
본관은 나주이며 호는 묵재(墨齋)이다. 나주의 설재서원에 배향되었다.

설재서원은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함께 은행, 동백, 잣나무 등이 조화를 이룬 아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성은 사당, 강당, 내삼문과 외삼문 대신 사각대문이 건립되어 있다.
관련유적으로는 쌍계정, <문정공설재선생유허비>(이범석 지음), 경무공 그림(경무공 정식이 세자궁에 불이 나자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 세자의 의복을 가지고 나온 상황을 그린 그림)이 있다.
참고-나주서원1,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나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