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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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동서원(道東書院)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466
   주 자(朱 子) 안 향(安 珦)
   1676년(숙종 2)
   
   3월 15일, 9월 15일
   도동묘(道東廟)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9호(1984.02.29지정) 도동묘 회헌실기목판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10호(1999.07.05지정) 도동묘 안향영정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9호(2004.02.13지정)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와 고려 명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매년 춘추로 두 차례 제사를 지내며 회헌실기목판(회헌 안향의 유작들을 모아 편찬한 목판)이 유형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향의 영정은 고려 1318년(충숙왕 5)에 그려져 문묘에 봉안되었고 이의 모사본 1본이 순흥향교에 봉안되었다. 후일 조선 세조 때 순흥부가 폐부되면서 향교도 폐지되자 서울의 종가로 영정이 옮겨지는 일도 있었다.
도동묘(道東廟)는 안호가 조선 1676년(숙종 2)에 우리나라 주자학의 시조인 안향과 중국 송나라 주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후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으나 처음 창건지이던 오곡면 승법리에서 오지리로 이안하였으며, 1868년(고종 5)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묘각이 훼철되기도 하였다. 1902년 기우만이 도내의 유림들과 협의하여 주자를 주벽으로 하고 안향을 동벽으로 모시도록 하여 복설하였다.

1)주벽-주자(朱子, 1130~1200)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정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2)안향(安珦, 1243∼1306)
고려 후기의 명신(名臣)·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해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 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성윤(成允)의 딸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변경되었다.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郎)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해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 (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 (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해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해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같은 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해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현재 건물은 도동묘(道東廟)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강당인 소술제가 있다. 도동묘는 1984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도동묘 회헌실기목판-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10호(1999.07.05지정)
고려시대 문인이자 유학자인 안향의 시문집
참고-곡성군 홈페이지 http://www.simcheong.com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곡성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