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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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건암서원(建巖書院)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 명곡마을
   명곡 이산보(李山甫)· 의병장 조헌(趙憲)· 풍옥헌 조수륜(趙守倫)· 청강 조속(趙涑) 선생
   1662년(현종 3)
   1703년(숙종 29)
   
   
건암서원은 충남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 명곡마을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 1662년(현종 3)에 창건되었으며, 명곡 이산보(李山甫)· 의병장 조헌(趙憲)· 풍옥헌 조수륜(趙守倫)· 청강 조속(趙涑)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1703년(숙종 29)에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진 뒤 복원되지 못했다.

1) 이산보(李山甫) 1539(중종 3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무(之茂)이다. 숙부인 지함(之菡)에게 배웠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전적·해미현감·정언 등을 지냈다.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를 순찰하고 돌아온 뒤 수찬·지평·사인·응교·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동인의 탄핵을 받아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좌천되었다가 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 1585년 이이(李珥)·정철(鄭澈)을 논박한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을 반박한 일로 선조의 신임을 얻어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정철·박순(朴淳) 등의 공을 논하다가 경상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으로서 사건을 다스렸고, 이듬 해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정철 등 서인이 화를 입자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한 뒤 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고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북도와 삼남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 나갔다. 좌참찬을 지내고 1594년 대기근을 수습하려고 애쓰다 죽었다.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 2등으로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
봉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보령 화암서원(花巖書院), 서천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2) 조헌(趙憲)
1544(중종 39)∼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출생. 응지(應祉)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으며,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
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령(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자청하여 보은현감으로 나가는 동안,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으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므로,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 600여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하여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우세한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금산전투라 일컬어 숭모하게 되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3) 조수륜(趙守倫)
1555(명종 10)∼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만귀(歸). 아버지는 홍문관응교 정기(廷機)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강욱(姜昱)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4년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90년에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중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곧 해직되고, 1601년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복직되었다.
1604년 대흥현감에 제수되었다가 1607년에 파직되었고, 1609년(광해군 1)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1611년에 평택현감이 되었다.
1612년 신율(申慄)이 황혁(黃赫)과의 구원(仇怨)으로 역옥(逆獄)을 일으켰는데 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성혼의 문하에서 행실이 단아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으며, 경학에도 조예가 있어 그가 집무하는 관아에서 여러 동문들과 함께 《우계집 牛溪集》을 편집, 출간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다.

4) 조속(趙涑)
1595(선조 28)~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 아버지는 병조참판 수륜(守倫)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1627년(인조 5) 덕산현감을 거쳐 장령·진선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함으로써 청표탁행(淸標卓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기도 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금석문을 수집하여 이 방면의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그림에서는 묵매·영모(翎毛)·산수에 능했는데 특히 금강산과 오대산을 비롯한 명승을 두루 다니며 사생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유작들 중에는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간송미술관) 등도 있지만 그보다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까치와 물새를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와 묵매 등에서 격조높은 개성을 발휘했다. 성글고
까칠한 붓질과 야취(野趣) 어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화조화풍은 아들인 지운(之耘)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국립중앙박물관)·〈매작도 梅鵲圖〉(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