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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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검계서원(儉溪書院)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삼태리 219
   전 신(全 信) 이 협(李 筴)
   1766년(영조 42)
   
   음 3월 10일
   전씨시조단소 및 재실-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97호 (1987․12․30지정)
검계서원(양현사)은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 문헌비고, 동국원우록, 조두록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영성지와 충청도읍지에는 실려있다. 영성지에 검계서원(향현사)의 위치로 적혀있는 검벌리가 충청도읍지에는 검계리(儉溪里)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현재의 위치인 삼태리를 가리킨다. 전신의 후손 문중에서는 이곳에 영조 병술년인 1766년(영조 42)에 진사 채홍신(蔡弘臣)과 진사 전시덕(全始德)이 주동이 되어 검계서원(儉溪書院)을 건립하고 비로소 의절을 갖추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검계서원은 문중사우로 설립된 검계서사(儉溪書社)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1807년(순조 7)사림의 공의로 진사 채홍신이 대표가 되어 고을의 선비 76명의 연명상서로 전신(全信)과 이협(李筴)을 본 서원에 배향할 것을 예조에 품하여 예조로부터 양선생을 배향해도 괜찮다는 문서가 내려왔는데, 진사 채홍신·처사 전사성이 주선을 하여 배향하고, 축문은 송강재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이 검계서사는 그 후 1829년(순조 29)에 중수되고 있는데, 이때의 중수기는 전신의 후손인 전사성이 썼다.
현재 양현사에 병술년 9월의 ‘검계서사(儉溪書社)’와 기해년의 ‘검계서원(儉溪書院)’ 현판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검계서사라고 불리우다가 언제인가부터 검계서원으로 바뀌었고, 언제부터인가 양현사로 불리운 것으로 추측된다. 확인 가능한 최초의 양현사 명칭은 1860년에 관에서 발급한 「양현사원생안」이라는 완문(完文)을 통해서이다. 이 완문에는 양현사라는 표기가 보일뿐만 아니라 당시 천안군에서 양현사에 원생(院生) 5명과 원노(院奴) 5명을 제급해 주고 있다.
검계사원(양현사)은 1871년(고종 10) 대원군이 서원정리를 할 때 모두 훼철되었다. 그 후 1897년 전신의 후손인 전달복(全達復)이 주동이 되어 검계서사가 있던 터의 뒤에 단소를 설단하고 비를 세웠으며, 나아가 서사를 건립하였다. 또한 간재 전우가 1901년에 검계서사기를 지었다. 문중에서는 최근 1976년에 양현사를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검계서원은 천안지역 유림들의 건의로 1999년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되었고 천안지역 유림의 주관과 천안시의 지원으로 매년 음력 3월 10일 제향을 거행한다.

1)주벽-전신(全信, 1276∼133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이립(而立), 호는 백헌(栢軒). 밀직사를 지낸 승(昇)의 아들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뒤 내의직장(內衣直長)으로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하고, 다음해 숭경부승(崇慶府丞)이 되었다. 이어서 정방관(政房官)에 발탁되었고, 비서랑(秘書郞)에 올랐다. 1304년 국학직강(國學直講), 1307년 안동부판관, 1309년(충선왕 1) 전의부령(典儀府令), 1311년 김해부사, 1314년(충숙왕 1) 사헌장령·선부의랑(選部議郎)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317년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오르고 1319년 계림부윤, 1321년 복주목사(福州牧使)를 역임하였으며 1330년(충혜왕 즉위년) 감찰대부진현관대제학직사사상의회의도감사(監察大夫進賢館大提學直司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된 뒤 1332년(충숙왕 복위 1)학 상호군(上護軍)에 올랐고, 다음해 동지밀 은퇴하였다.
그는 성품이 엄격하고 근면하였으며, 집이 가난하였으나 산업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백이정(白頤正)·김제안(金齊顔)·이제현(李齊賢) 등 현사들과 교의(交誼)가 두터웠으며, 또한 최해(崔瀣)와도 친교가 있었으므로 그의 묘비문을 썼다. 충청남도 천안의 검계서원(儉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2)이협(李筴, 1583~1665)
조선중기의 문인, 본관은 성주이며 자는 자용(子用), 호는 남악(南嶽), 직산에 거주하였고 천안전씨 전득중의 사위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영릉참봉을 지냈으며, 광해군조에 범사가 강상에 어긋나므로 상소를 올렸으나 듣지를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은거를 하는 동안 조정에서 수차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현재 천안군 동남구 풍세면 삼태리에 있는 태화산의 북쪽줄기인 앵봉의 동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뒤쪽에는 천안전씨의 시조묘가 있고 그 앞으로 좌우에 전신의 부친인 전승(全昇)의 단소(壇所)와 전신의 단소가 있으며 그 옆으로 설단비(設壇碑)가 서있다.
단소 아래는 오른쪽에 전씨 시조사당인 충훈사(忠勳祠), 왼쪽에 양현사가 있으며 각각의 사우에는 삼문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양현사의 삼문 담장 밖으로 검계서원과 숭인제가 있으며 외삼문 앞에는 전씨시조와 전신부자의 신도비가 서 있다. 현재 전씨 시조 단소 및 재실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1)천안전씨의 문중에 양현사와 관련된 자료로 1807년에 관찰사에게 올린 상서문과 양현사원생안이 소장되어 있다.
상서문 가로 90cm×세로 139cm
양현사원생안(경신 윤삼월 일) 가로 24,5cm×32.5cm, 6장(표지포함)
 
2)검계서원현판
 
3)전씨시조단소 및 재실-충청남도문화재자료 297호(1987․12․30지정)
전씨 시조인 전섭이 살던 마을의 묘단과 재실로 묘는 없어졌는데 이후 후손이 단소를 설단하여 향사를 해왔으며, 1976년 중건하였다. 재실은 묘단 앞에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둥근기둥과 4각기둥을 혼용하였고, 주위는 담장을 둘렀으며, 출입문은 솟을삼문이다. 재실 오른쪽에 수묘사를 지었고, 출입구는 삼문으로 하였다. 묘 앞에 상석 “양석” 문석인 “망주석”을, 왼쪽에는 장명등을, 오른쪽에는 비를 세웠다. 단소의 아래 오른쪽에 양현사(兩賢祠)가 있는데, 전섭의 후손 전신(全信)과 이협의 위패가 있다. 숭인재와 검계서원 외삼문 앞에 전섭의 신도비와 전승, 전신의 신도비가 있으며 전섭시조 단소일대는 노송의 숲이 우거져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보기드문 희귀종인 200년 이상된 늘어진 소나무가 있고 또한 천안시의 보호수인 300년 된 모과나무가 있으며 주변에는 영산홍 꽃이 만발하며 경치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