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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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독성서원(獨醒書院)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179번지
   임 창(任 敞) 임징하(任徵夏) 임헌회(任憲晦) 임홍망(任弘望)
   1858년 독성서사 건립
   
   음력 3워 11일
   
독성서원(獨醒書院)은 본래 경향 유림들의 발의로 철종 9(1858)년 독성서사(獨醒書社)로 세워 해마다 제향을 받들어 오다가 만 10년 되던 해 고종 5(1868)년 9월 대원군의 훼철령(毁撤令)으로 헐려진 것을 2004년 4월 30일 복설(復設)한 서원으로서 배향위는 효정공(孝貞公) 죽실(竹室) 임홍망(任弘望) (1635~1715), 충정공(忠定公) 강개옹(慷槪翁) 임창(任敞) (1652~1723), 충헌공(忠憲公) 서재(西齋) 임징하(任徵夏) (1687~1730), 문경공(文敬公)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 4위 선생이다.

1)임창任敞)
숙종 15(1689)년에 인현황후(仁賢皇后)가 폐위되는 이변이 일어나자 참지못한 공은 한낱 포의(布衣)로서 걸어서 상경하여 대궐 밖에서 목 놓아 울부짖으며 복위를 성토하고 장희빈(張禧嬪)의 흉계를 고묘(古廟)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렸으나 공의 충언을 오히려 괴언망설(怪言妄說)로 몰아 트집을 잡고 전라북도 부안으로 유배하고 이듬해 제주도로 유배하더니 다시 이송(移送)하여 혹독(酷毒)한 고문 끝에 마침내 경종 3(1723)년 6월 4일 서울 당고개(堂古介) 형장(刑場)에서 순절(殉節)되었으니, 이때의 연세는 72세의 고령이었다. 국모(國母)의 보위(保衛)를 지키고자 해서 충성스런 고절(苦節)로 구국(救國)의 절사(節士)가 된 공에게 철종 8(1857)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직(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贈職) 이 내려지면서 시호 충정(諡號 忠定)을 받았다.
 
2)임징하(任徵夏)
27세에 사마양시(司馬兩詩)에 급제하고 이듬해 증광시(增廣詩)에 합격해 출사하면서 영조 2(1726)년 통훈대부 사헌부 장령(通訓大夫 司憲府 掌令)으로 당시 국정 탕평책(國政 蕩平策)의 맹점(盲點)을 만언상소문육개조항(萬言上疏文六個條項을 올려 임신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국체(國體)를 어지럽힌 불의의 흉당들을 규탄하였으나 오히려 국정시책인 탕평책(蕩平策)에 어긋난다하여 공은 제주도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영조 4(1728)년 서울 의금부(義禁府)에 이감(移監)되어 전후 28차에 걸친 혹독(酷毒)한 고문에도 태연자약한 가운데 물고(物故)되어 순절(殉節)하면서도 끝까지 절의(節義)를 굽힐줄 몰랐다. 몰후(沒後) 정조 원(1776)년에 공의 무고(誣告)함이 신원(伸寃) 복직(復職)된 뒤 순조 9(1809)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吏曹參判 兼 同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동지춘추관(同知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館)에 증직되고, 15년이 지나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吏曹判書 兼 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춘추관(知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추서(追敍)되면서 시호 충헌(忠憲)을 받으니, 나라의 예도(禮道) 확립(確立)과 의(義)로운 덕치(德治) 구현(具現)을 과감하고도 일관성 있게 직간(直諫)한 공의 절의(絶義)와 순도(殉道)는 사림(士林)의 원기를 길이 대변한다.
 
3)임헌회(任憲晦)
26세에 감시(監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접어둔채 성리학(性理學) 연구에만 몰두되어 있던 공의 명망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나라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사직소(辭職疎)를 올려 부임치 아니하였다. 55세로 경연관(經筵官)을 사직하고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하며 육영사업(育英事業)에만 몰두했다. 65세에도 서연관(書筵官) 대사헌(大司憲) 등에 거듭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한 일이 없었다. 고종 13(1876)년 66수로 절세(絶世)함에 나라에서는 지방관을 특파하여 임산림(林山林)에 대한 치제의 예를 다하였으며 광무 6(1902)년 자헌대부(資憲大父)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서되고 1908년 추서된 시호는 문경(文敬)을 받으니 근세 한국의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의 청류적(淸流的) 연원이라 할 수 있다.
 
4)임홍망(任弘望)
충정공의 숙부이고 충헌공의 친 조부이며 문경공의 7대 조부로서 문과(文科) 별시(別試)에 합격하고 1680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덕치(德治)와 상정법(詳定法) 등 선정(善政)을 베푼 목민관(牧民官)으로 추앙 받았다. 1684년 예조참의(禮曹參議) 우승지(右承旨)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오른 뒤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재직중(在職中) 병인(丙寅)(1686년) 풍천임씨(豊川任氏) 족보(族譜) 제2간(第2刊) 해주보(海州譜)를 발간(發刊)하시며 1688(53세)년에 충청(忠淸)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고 64세에 호조참판(戶曹參判), 다음 해 공조참판(工曹參判) 겸(兼) 귀후서제조(歸厚書提調)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도승지(都承旨)에 오른다. 75세로 형조참판(刑曹參判), 4년 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팔순(八旬)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숙종 41(1715)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라 원로국사(元老國士)로 기노사(耆老社)에 들게 되나, 향년 81수로 서거 후 고종 9(1872)년 조정에서 시호 효정(孝貞)을 받으니 관직에 오래 머물렀으나 주머니는 늘 비어 있었고, 60 평생 오직 해진 말 안장만 애용했으며, 자애(慈愛)와 은혜(恩惠)로 어버이를 섬긴 효(孝)에 청백리(淸白吏)의 분수를 지킨 정(貞)의 뜻이 공으로부터 풍임(豊任)의 충효가(忠孝家)다운 명덕(明德)의 가풍(家風)은 선비정신의 원류를 받들어 찬연한 빛을 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