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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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노강서원(魯岡書院)
   http://www.nrich.go.kr/kr/mmulti/mContentV.jsp?ca_id=4&arc_id=375&arc_… [1664]
   충남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227
   윤황(尹煌),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1675년(숙종 1)
   1682년(숙종 8)
   
   보물1746호 (논산 노강서원 강당 )
본 서원은 1675년(숙종 1) 노성면에 건립되었으며 1682년(숙종 8) 사액되었다. 제향인물은 윤황(尹煌)을 주향으로 하고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3인을 추향하였다. 창건 당시는 윤황과 윤선거 부자만 봉안하였는데 1682년(숙종 8) 사액과 더불어 선거의 형 윤문거를 차향(次享)에 봉안하였고 1723년(경종 3) 윤증을 추향하였다.
그 후 1717년(숙종 43) 정쟁(政爭)으로 인해 윤선거·윤증 부자의 관직이 삭탈되면서 사액 현판까지 철거되었다가 1722년(경종 2) 양인의 관직 회복과 더불어 현판이 복액되었으며 1781년(정조 5) 중수하였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비교적 잘 보존된 서원이다.
윤황은 노성을 가향으로 삼아 살아 온 파평윤씨의 일족이며 추향 3인은 그의 자손들이다. 윤문거와 윤선거는 형제간으로 윤황의 아들이며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 된다. 학맥으로 보면 윤황은 성혼의 문인이고 윤선거는 김장생의 문인이자 충청오현(忠淸五賢)에 드는 서인의 거두이며 윤증은 소론의 영수이다. 따라서 본 서원의 성향은 기호계이며 제향인들의 면면으로 볼 때 파평윤씨의 대표적 문중서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중서원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서원의 건립부터 운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노강서원은 기호지방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 같다. 처음 서원의 건립을 발의하였던 인물들은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하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좌상 조사석(趙師錫), 영상 여성제(呂聖齊), 우상 신익상(申翼相), 민유중(閔維重) 등으로 당대의 명상·명현들이다.
특히 노강서원의 영건문(營建文)을 지은 이는 김수항이다. 그는 김상헌의 손자이자 송시열과 같이 활약한 서인의 중진이며 나중에는 노론에 가담하여 윤증 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강서원 건립 당시는 노·소론 갈등이 첨예화되기 이전이므로 김수항이 영건문을 썼던 것 같다. 이로써 볼 때 서원은 파평윤씨의 문중서원이면서 동시에 기호계의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조 들어 조정 대신들 간에 윤선거 문집의 판본 훼철이 크게 논의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훼철 반대론자들은 윤선거 문집의 부록에 김수항의

1)주벽-윤황(尹煌, 1572~1639)
윤황은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덕요(德耀)이고, 호는 팔송(八松)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97년(선종 30)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직되고 전적(典籍)으로 승진, 검찰·정언, 병조·예조·형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봉상시정(奉常時正),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전임한 뒤 반대파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니산(尼山)에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청렴한 관리로 지목되어 장령·집의·대사간·동부승지·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그후 전주 부윤을 지냈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당하여 임금이 공주에 있을 때 어영사(御營使)로서 반군 토벌의 임무를 맡았던 이귀가 싸워볼 생각도 못하고 돌아오자 윤황은 군법으로 처벌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7년(인조 15) 김상헌, 정온 등이 척화파로 청에 잡혀갈 때 윤황이 와병 중이어서 아들 문거는 부친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를 안 윤황은 아들을 크게 책망하며 척화의 신하인 자기가 청에 잡혀가야 한다고 왕에게 상소하였다. 허락되지는 않았으나 상소문 중에 불손한 구절이 있다고 하여 영동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니산으로 돌아와 “나는 선묘(先墓)나 지키다가 죽겠다”하고 이후로는 시국에 대한 일을 절대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2)윤문거(尹文擧, 1606~1672)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여망(汝望)이고, 호는 석호(石湖)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윤황의 아들이자 윤선거의 형이 된다.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당시 정치상황이 혼탁하여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였으나 부친을 돕기 위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일을 맡아 보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따라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청과의 화의가 그릇됨을 지적,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전쟁에서 패하자 조정에서는 청과의 강화를 위해 김상헌 등 척화파 신하들을 인질로 청에 보내려 하였다. 이때 부친인 윤황이 대신 붙잡혀 갈 것을 자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소문 중에 불손한 문구가 있어 귀양 가게 되자 윤문거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를 잡아가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1639년 유배되었던 부친이 병으로 풀려나와 죽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며 효종 때 잠시 동래부사를 역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 후 승지, 이조·호조·형조의 참의(參議),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된 것만 15회, 대사간이 3회, 이조참판이 5회였으나 향리에 은거한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2년(현종 13)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현종이 애석하게 여겨 제수와 인부를 보내 주었고 이조판서에 증직하였다. 숙종 때 충경(忠敬)의 시호를 내렸다.
 
 
3)윤선거(尹宣擧, 1610~1669)
윤선거는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길보(吉甫)이고, 호는 미촌(美村), 노서(魯西)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송시열·송준길 등과 더불어 “충청오현”에 드는 윤선거는 윤황의 아들이자 윤순거의 아우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1633녀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 사신이 오자 유생들을 인솔하여 청 사신인 용골대를 죽이고 명에 대한 의를 지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해 겨울 청 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오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37년 마침내 강화도가 함락되고, 중부(仲父)인 윤전, 권장순, 김익겸 등은 전사하였고 윤선거의 처 이씨도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평민의 복장으로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부친 윤황은 척화를 주장한 죄로 유배당했다. 윤선거는 살아남은 것을 스스로 책망하며 국가에서 자의(諮議), 형조 좌랑(刑曹佐郞),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금산에서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힘쓰며 호서사림의 종장(宗匠) 김집에게 사사, 예론(禮論)에 정통하였고 성리학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후에 송시열과 뜻이 맞지 않아 노소분파의 단초를 이루었다. 또 모든 예의 원류가 되는 예서로서

구릉을 등지고 남서향인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배치하고 있다. 서원 전면에 들을 두고 뒤로는 구릉을 등지고 좌우에 민가들이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을 중심으로 북편에 강당이 전면을 향해 서있고, 동재, 서재가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강당 뒤편에는 높은 단을 조성하여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사당 주위에는 담을 둘러 엄숙함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전면에 강학공간, 후면에 사당이 배치된 ‘전학후모’식 배치이다.
 
1)사당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면 열은 퇴칸으로 하고 후면 2열은 내부공간으로 만들었다. 퇴칸 좌우측은 심벽으로 막아 두었다. 1고주 5량집 구조에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2)강당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꾸미고, 양 측면에서는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온돌방 전면에는 퇴칸으로 하여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되게 하였다. 양 측면 툇마루 밑은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2고주 5량집 구조이고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이 강당의 크기가 의외로 크고 화려한데, 이는 사당의 구조를 따라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3)동재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3량집 구조에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측면에 풍판을 달지 않고 박공으로 처리했다. 내부공간은 남측의 2칸을 대청마루로 하고, 북측 2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4)서재
정명 1칸, 측면 1칸으로 구조는 동재와 같이 3량집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북측의 2칸은 온돌방으로 두고 남측 2칸 중 한 칸은 부엌, 한 칸은 창고를 두었다.
노강서원 강당(보물1746호)
노강서원 강당은 정면 5칸, 옆면 3칸 건물로 새의 날개처럼 생긴 공포 형식이 돋보이고 맞배지붕의 옆면에 덧붙인 내림지붕은 비바람을 막고 건물에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는 기능을 한다. 이런 양식적인 특성 탓에 17세기 말 서원 건축의 시대적인 양상을 잘 드러내는 건축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