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윤황(尹煌, 1572~1639)
윤황은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덕요(德耀)이고, 호는 팔송(八松)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97년(선종 30)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직되고 전적(典籍)으로 승진, 검찰·정언, 병조·예조·형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봉상시정(奉常時正),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전임한 뒤 반대파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니산(尼山)에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청렴한 관리로 지목되어 장령·집의·대사간·동부승지·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그후 전주 부윤을 지냈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당하여 임금이 공주에 있을 때 어영사(御營使)로서 반군 토벌의 임무를 맡았던 이귀가 싸워볼 생각도 못하고 돌아오자 윤황은 군법으로 처벌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7년(인조 15) 김상헌, 정온 등이 척화파로 청에 잡혀갈 때 윤황이 와병 중이어서 아들 문거는 부친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를 안 윤황은 아들을 크게 책망하며 척화의 신하인 자기가 청에 잡혀가야 한다고 왕에게 상소하였다. 허락되지는 않았으나 상소문 중에 불손한 구절이 있다고 하여 영동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니산으로 돌아와 “나는 선묘(先墓)나 지키다가 죽겠다”하고 이후로는 시국에 대한 일을 절대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2)윤문거(尹文擧, 1606~1672)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여망(汝望)이고, 호는 석호(石湖)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윤황의 아들이자 윤선거의 형이 된다.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당시 정치상황이 혼탁하여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였으나 부친을 돕기 위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일을 맡아 보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따라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청과의 화의가 그릇됨을 지적,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전쟁에서 패하자 조정에서는 청과의 강화를 위해 김상헌 등 척화파 신하들을 인질로 청에 보내려 하였다. 이때 부친인 윤황이 대신 붙잡혀 갈 것을 자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소문 중에 불손한 문구가 있어 귀양 가게 되자 윤문거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를 잡아가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1639년 유배되었던 부친이 병으로 풀려나와 죽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며 효종 때 잠시 동래부사를 역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 후 승지, 이조·호조·형조의 참의(參議),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된 것만 15회, 대사간이 3회, 이조참판이 5회였으나 향리에 은거한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2년(현종 13)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현종이 애석하게 여겨 제수와 인부를 보내 주었고 이조판서에 증직하였다. 숙종 때 충경(忠敬)의 시호를 내렸다.
3)윤선거(尹宣擧, 1610~1669)
윤선거는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길보(吉甫)이고, 호는 미촌(美村), 노서(魯西)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송시열·송준길 등과 더불어 “충청오현”에 드는 윤선거는 윤황의 아들이자 윤순거의 아우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1633녀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 사신이 오자 유생들을 인솔하여 청 사신인 용골대를 죽이고 명에 대한 의를 지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해 겨울 청 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오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37년 마침내 강화도가 함락되고, 중부(仲父)인 윤전, 권장순, 김익겸 등은 전사하였고 윤선거의 처 이씨도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평민의 복장으로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부친 윤황은 척화를 주장한 죄로 유배당했다. 윤선거는 살아남은 것을 스스로 책망하며 국가에서 자의(諮議), 형조 좌랑(刑曹佐郞),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금산에서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힘쓰며 호서사림의 종장(宗匠) 김집에게 사사, 예론(禮論)에 정통하였고 성리학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후에 송시열과 뜻이 맞지 않아 노소분파의 단초를 이루었다. 또 모든 예의 원류가 되는 예서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