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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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강서원(龍江書院)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유 계(兪 棨)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1716년(숙종 42)
   
   불향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9호(1984.05.17지정)
용강서원은 1716년(숙종 42)에 세워진 서원이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10년경 지역 유림들이 헐린 재목의 일부를 모아서 용강서당을 짓고 유림의 회합 및 자제교육의 장으로 이용하였다. 금산에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서원으로 용강서원 이외에 성곡서원(星谷書院)을 비롯하여 산천재서원(山泉齋書院), 유곡서원(柳谷書院), 반계서원(磻溪書院)등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서원의 건물은 용강서원의 용산서당 뿐이다.
용강서원이 창건되면서 배향되는 인물은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시남 유계(市南 兪棨) 등이다. 유계는 병자호란 후 한동안 금산에 머물며 학문을 닦았는데 이것이 뒷날 본 서원에 배향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유계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준길, 송시열과는 동문의 관계였고, 훗날 그가 죄를 얻어 면직되었을 때 양송(兩宋)의 추천으로 재등용 되는 등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므로 3인이 나란히 병향된 것이다.
용강서원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발전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18세기 말에 용강서원에 추배되는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과 역천 송명흠(櫟泉 宋明欽)이 용강서원과 관계하면서 시작된다. 김원행과 송명흠 두 사람은 오랜 지기(知己) 사이로 친분을 맺어 왔다. 김원행이 용강서원과 교분을 맺게 되는 계기는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 4대신이었던 김원행의 할아버지 김창집(金昌集)이 사사(賜死)되고 김원행의 집은 용화리와 인접한 제연면 천내리에 유배되어 용강서원에 출입하면서 강론한 것이다. 또한 송명흠도 당시 노·소론간의 치열한 당쟁을 피해 아버지 묵옹 요좌(黙翁 堯佐)와 함께 옥천에 살면서 용강서원에 출입하며 강론하였다. 이러한 용강서원의 발전은 19세기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1819년에 작성되기 시작하여 1861년까지 계속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1)주벽-송시열(宋時烈, 1607~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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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으나, 1910년경 유림이 헐린 재목의 일부를 모아서 강당을 복원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강당이 있는데,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어왔으며, 현재는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는 곳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용강서원에도 다양한 고문서 자료가 소장되어 이를 성격별로 구분하면 대개 서원 유생안(작고한 유생들의 명부인 선안(仙案)도 있다). 원장을 비롯한 재임안(齋任案), 강학을 위한 용강서당契 문서, 그리고 서원을 찾은 방문객 명단인 심원록(尋院錄) 자료가 매우 많이 보존되어 있다. 이 같은 심원록이 많다는 사실은 이 서원이 그 만큼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과시하는 일면으로 보여진다. 한편 서원 운영상에서 임원의 선정에 관련된 망기(望記), 천장(薦狀)과 경제운영의 실상을 보여주는 도조기(賭租記)자료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