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에 급제하여 경릉참봉을 시작으로, 나중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청나라에 당한 병자호란의 복수를 위한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이 죽은 후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문제로 이른바 예송 논쟁을 일으키며, 노론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이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청주의 화양동에서 은거하던 중 숙종 15년(1689) 나중에 경종이 된 왕세자의 책봉문제로 상소하였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국문을 받기위하여 서울로 올라오던 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기호학파의 주류였으며, 특히 예론에 밝았다고 한다.
시호는 문정공이며, 문묘와 효종의 묘에 제향되었다. 강한사는 배치나 품격이 뛰어난 건물이다.
1873년 성균관 유생 이세우 등이 대원군에게 대로(大老 : 덕이 높고 학식이 풍부하여 존경할 만한 노인)의 존호를 올릴 것을 상소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는다. 조선에는 대로가 둘이 있었는데 우암 송시열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었다. 하늘 아래 2개의 태양이 없는 법이라 그랬는지 흥선대원군이 대로라 불리게 되자 우암의 사당인 대로사가 강한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때 박규수(朴珪壽, 연암 박지원의 손자, 대동강에서 미군함 제너럴셔먼호를 격퇴한 인물)가 왕의 명을 받아 현판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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