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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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118-1
   정몽주(鄭夢周) 정 보(鄭 保) 이시직(李時稷) 오달제(吳達濟)
   1576년(선조 9)
   1608년(광해군 원년)
   음력 3월 9월 중정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호(1972.05.04지정) 충렬서원중수록(忠烈書院重修錄)-용인시향토유적 제26호(1990.11.22지정) 충렬서원선생안(忠烈書院先生案)-용인시향토유적 제27호(1990.11.22지정) 정몽주초상-용인시향토유적 제13호(1990.11.22지정)
충렬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이며 동방 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정몽주를 배향하고 있다. 본 서원은 1576년(선조 9)에 창건되었으며, 이계(李啓), 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와 조광조의 학덕 및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충렬사(忠烈祠)로서 사우형태였으며,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죽전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1605년(선조 38)경에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 용인현감 정종선(鄭從善), 진사 이시윤(李時尹) 등의 노력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다.

1)주벽-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몽주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 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 朱子集註≫에 대한 그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해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대사성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해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사신의 임무를 다해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해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고려 말 다사다난하던 때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 일이나 큰 의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해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해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 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정보(鄭保,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운곡(雲谷). 할아버지는 몽주(夢周)이며, 아버지는 이조참의 종성(宗城)이다.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한때 예안현감으로 나갔다가 감찰이 되었다.
일찍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인척 되는 한명회(韓明澮)에게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천추의 악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한명회가 그 해 12월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으나, 세조는 그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연일(延日)에 유배시켰다. 그 뒤 단성으로 이배되었다가 간사한 무리들의 참소로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1699년(숙종 25)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유(李濡)의 상소로 신원(伸寃),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용인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제향되었으나 대원군 때 서원이 헐렸다.
 
3)이시직(李時稷, 1572∼16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삼송(三松).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석형(石亨)의 6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수 정현(廷顯)이고, 아버지는 찰방(察訪) 빈(賓)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응기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사축서 별제가 되었다. 이듬해 직장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같은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종묘서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35년 병조좌랑·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세자시강원필선 등과 장악원정·사복시정·봉상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1635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주부 송시영(宋時榮)이 먼저 자결하자, 묘 둘을 파서 시영을 매장하고 하나는 비워놓아 노복에게 자기를 그곳에 매장하도록 부탁한 다음 활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특히, 아들에게 전하라는 편지의 글 중에는 ‘살신성인부앙무작(殺身成仁俯仰無怍)’이라는 말이 보인다.
어려서 10세에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웠으며, 뒤에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와 회덕의 숭현사(崇賢祠)의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4)오달제(吳達濟, 1609∼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경민(景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문(希文)이고,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며, 어머니는 최형록(崔亨綠)의 딸이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병조좌랑·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청나라와 화친을 위해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해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청나라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尹集)과 더불어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게 되었다.
그는 묵매(墨梅)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조속(趙涑)·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 화풍에 영향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림은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서원은 정몽주의 묘역 아래에 있는 마을의 뒤쪽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시설물로는 사당·내삼문·강당·외삼문·홍살문 등이 있으며, 「단심가(丹心歌)」를 새긴 비가 최근에 건립되었다.
충렬서원의 건물 구조는 단순한 모습을 띠고 있다. 경사지에 사당과 강당을 중심으로 재실이나 장격각, 교직사 등이 배제된 변형된 구조이다. 특히 충렬서원은 일정한 중심축이 없어 외삼문에 들어서면 사당과 강당이 동시에 보인다.
사당에는 중앙에 감실을 마련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하고, 양쪽에 정보·이시직·오달제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강당은 원내 행사시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1)충렬서원중수록(忠烈書院重修錄)-용인시향토유적 제26호
모현면 능원리에 소재한 충렬서원을 중수하던 당시 제반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살피면 중수기 표지, 중수기 년기(重修記 年記), 원장(院長), 품계별 유사록(品階別有司錄), 경유사유, 전곡유사, 헌납기(1), 헌납기(2), 물종기, 목단잡화질, 산림목청구질, 보군질, 총계, 강당기(講堂記), 사우기(祠宇記), 중건기(重建記), 화상기(畵像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2)충렬서원선생안(忠烈書院先生案)-용인시향토유적 제27호
이 책 이름에서 시사하듯이, 충렬서원(忠烈書院)의 역대 선생(원장) 명단을 정리한 것으로 필본(手筆本)이다. 24.5cm×34cm크기의 저지(楮紙)를 5첩(帖)하였으며, 각 면마다 5행(行)의 적선(赤線)을 넣어 행간을 구별하고, 역대 선생의 호(號)와 직함, 성명, 보임기간 등을 기록해 두었다. 표지에는 「忠烈書院」만 적혀있다.
이 자료는 총 5첩(帖)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첩에는 충렬서원이 초창되었을 때인 선조 9년 (1576)부터 새로 증건하기 시작한 병오년(丙午年:1666) 다음해인 승정(崇禎) 기원후 40년 정미(丁未:1667) 이전까지의 역대 선생에 관련한 인적사항 이 기록되어 있다. 2첩에는 기천 (沂川) 홍명하(洪命夏)에 이르기까지 상신(相臣) 9명에 대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부터는 제작기간 년기(年記)까지 기록되어 있다. 3첩과 4첩에도 역대 선생들의 이름자와 직함이 기록되어 있다. 5첩에는 이경재가 임자년(壬子年:1852)까지 원장직을 맡았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12년 후인 1864년의 대원군 섭정 이후 일시 훼철을 겪으면서 선생안의 기록도 끝마쳐져 있다.

3)정몽주초상-용인시향토유적 제13호
정몽주(鄭夢周)의 초상은 모현면 능원리 충렬서원(忠烈書院)과 영당(影堂)에 각각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