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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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기천서원(沂川書院)
   경기도 여주군 금마면 이포리 26-1
   김안국(金安國) 이언적(李彦迪) 홍인우(洪仁祐) 정 엽(鄭 曄) 이원익(李元翼) 홍명구(洪命耈) 이 식(李 植)
   1580년(선조 13)
   1625년(인조 3)
    음력 2월 8월 중정일(中丁日)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5호(1987.02.12지정)
기천서원은 1580년(선조 13)에 여주목사인 박승임(朴承任)이 유림과 논의하여 중종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안국(金安國)을 추모하기 위해 마생동에 마암사원(馬巖書院)을 세원 데서 비롯되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41)에 현 위치에 복원하였고, 1611년(광해군 3)에 이언적(李彦迪)과 홍인우(洪仁祐)를 추가 배향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기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661년에 정엽(鄭曄), 이원익(李元翼), 홍명구(洪命耈)가, 1708년(숙종 34)에 이식(李植)이, 1802년(순조 2)에 이식(李植)가 추향되어 총 8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 후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정책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37년에 김영진 등 지역 유림 백여 명이 기금을 모아 사우를 중건하고 모현사(慕賢祠)라 하였다. 1979년에는 서예가 김충현의 후원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기천서원으로 복구하였다. 이어 1987년과 1994년에 부속건물이 중수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서원은 남양홍씨 종친회에서 관리하며,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1)주벽-김안국(金安國, 1478∼1543)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 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 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 辟瘟方≫·≪창진방 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 닥풀. 종이 만드는 풀나무)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 慕齋家訓≫·≪동몽선습 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 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2)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 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 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해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여기에서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러 개 남겼다. ≪구인록 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 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던 것이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 태도에 비해 매우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그의 미완성 절필이다. 이 저술도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의 9경(九經:修身·尊賢·親親·敬大臣·體群臣·子庶民·來百工·柔遠人·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 저술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한 저술이요, 뒷날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 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 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 근본의 일강령은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27세에 지은 <오잠 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들고 있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 (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3)홍인우(洪仁祐, 1515∼155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恥齋).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덕연(德演)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량(思良)의 딸이다.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심경≫·≪근사록≫·≪중용≫·≪대학≫에 전심하였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시 명인들과 강마하고 논란하였다. 노수신(盧守愼)과 허엽(許曄)은 학문하는 중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서신이나 구두로 물었고, 김안국(金安國)도 그의 학행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어버이의 병환으로 의서를 배워 약의 처방을 알았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치재집≫ 2권과 ≪관동일록 關東日錄≫이 있다.
 
4)정엽(鄭曄, 1563∼16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희년(熙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璇)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성(惟誠)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증찬성 언태(彦台)의 딸이다.
3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4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지함(李之菡)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수업하고, 성혼(成渾)·이이의 문하에 출입하여 당시의 명류들과 교유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文翰職)을 맡았다.
1587년 감찰·형조좌랑이 되었으며,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귀국 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삼남대로에 있는 수원은 당시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나, 군민을 잘 다스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다. 1598년에 응교·집의로서 시강원필선을 겸하고,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지·대사간·예조참의를 역임했고, 영위사(迎慰使)로서 관서 지방에 다녀왔다.
이 무렵 척속 기자헌(奇自獻)이 이조좌랑의 추천을 받았으나 끝까지 반대하였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자, 성혼의 문인이었던 그도 종성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학교 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때마침 오랑캐 수만 명이 침입하자 계교로 적을 물리쳤다. 이 때 피해는 피로자(被擄者) 한 명 뿐이었으나, 기자헌의 농간으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1605년에 풀려나 이듬해 성주·홍주의 외직을 차례로 맡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대사성을 거쳐, 1610년에는 충청감사가 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승지·판결사·도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도승지로 있을 때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을 보고 직언하다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으나, 곧 참판에 오르고 1613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 사실을 밝히고자 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상소를 포기하고 도승지를 사직하였다. 1617년에 폐모론이 제기되자 외직을 구해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에 돌아와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강화도에 위리안치키로 된 광해군을 전날에 북면(北面)한 군주이므로 곡송(哭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주위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반정 초에 비변사의 합사(合辭)로 대사성에 동지경연(同知經筵)·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하는 중책이 맡겨져, 학제를 상정하여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겼다.
이후 곧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성을 그만두어야 했으나, 국왕의 특명으로 그대로 겸하게 되었는데, 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인조반정 이후 친명정책의 표방과 함께 후금에 대한 적극정책으로 적의 침입이 있으면 국왕이 삼군을 이끌고 송도에 진주한다는 친정(親征)의 계책이 공식적으로 택해졌는데, 이 안이 그로부터 나왔다. 또,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파천의 안을 과감히 제기한 것도 그였다.
공주에 있을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환도 후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대사헌에 제수되고, 또 우참찬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하기까지 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다. 저서로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와 ≪수몽집≫이 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5)이원익(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한성부 출신.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益寧君 袳)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 정은(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표(彪)이고, 아버지는 함천정(咸川正) 억재(億載)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강서(姜緖)·조충남(趙忠男) 등과 교유하였다.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다.
15세에 동학(東學 : 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해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한다. 유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자·저작 겸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 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 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 우부승지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자 왕자사부 하락(河洛)이 승정원을 탄핵하였다.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와 영의정의 불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화를 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해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그 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양곡 1만여 석을 청해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리고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던 안주 지방에 그가 권장해 심어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 : 이원익에 의해 계발된 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 때 평양 수비군이 겨우 3,000여 명으로서,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해 군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고,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해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자,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다.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해 정도(正道)를 지켜온 인물들이 내몰림을 당하자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 때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 홍여순(洪汝諄)·임국로(任國老)를 두둔하면서 조정 대신을 공격하자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했고, 또 선조의 양위(讓位 : 임금이 왕위를 다음 임금이 될 사람에게 물려줌)를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1600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방과 서북 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을 때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했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대비폐위론을 주장하자,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해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약해져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 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6)이식(李植, 1584∼164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곤거사(澤崑居士).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좌의정 행(荇)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이다. 어머니는 무송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 옥(玉)의 딸이다.
이식은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13년 설서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하였다.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
1621년 누차 출사(出仕)의 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왕명을 어겼다 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식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교분이 두터운 친구들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직에 발탁되어 이조좌랑에 등용되었다. 이듬해에 부수찬·응교·사간·집의를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예조참의·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대사간·대사성·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하였다. 사친(私親)의 추숭(追崇)이 예가 아님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8년 대제학과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한다 하여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에서 잡혀 갇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6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출제하였다가 시제에 역의(逆意)가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식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혔다. 그의 문장은 우리 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여한십가문초 麗韓十家文鈔≫에 <사간원차자 司諫院箚子> 등의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각 체에 모두 능숙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직서적인 것이 많다. 그는 고체에 능하였다. 오언율시에 가장 특색을 발휘하였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식의 문집으로는 ≪택당집≫이 전한다. ≪초학자훈증집 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 杜詩批解≫ 등을 저술하였다. ≪수성지 水城志≫·≪야사초본 野史初本≫ 등을 편찬하였다.
 
7)홍명구(洪命耉, 1596∼16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황해도관찰사 춘경(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국공신 성민(聖民)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서익(瑞翼)이며, 어머니는 심종민(沈宗敏)의 딸이다.
8세에 능히 시를 지으니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 같은 선비들이 칭찬하고 장차 큰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에 장원했으나 시골에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었다. 1625년 부수찬이 되고, 1627년 직강을 거쳐 교리·이조좌랑·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33년에 우승지가 되고, 1635년에 대사간·부제학을 거쳐 이듬해에는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갔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근왕병(勤王兵) 2,0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하던 중, 김화(金化)에 이르러 적의 대병과 맞닥뜨렸다.
시자(侍者)를 통해 노모에게 결별(訣別)의 글을 보낸 뒤, 1637년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적 수백 명을 살상한 끝에 전사하였다. 선봉 유림(柳琳)과 이일원(李一元)이 적을 완전히 격퇴하니, 병자호란 때 아군이 승리한 예는 이 전투와 김준룡(金俊龍)의 광교(光敎) 싸움뿐이었다. 뒤에 그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가 순절한 터에는 1650년(효종 1) 김화 고을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祠)를 세웠다. 그리고 1652년 의열(義烈)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평양의 충정서원(忠正書院), 자산(慈山)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순조 때 자손 병륜(秉輪) 등의 주청으로 체천(遞遷 : 제사를 받드는 자손의 대수가 끝나면 神主를 옮김.)하지 않는 은전이 내렸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8)홍명하(洪命夏, 1608∼166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 황해도관찰사 춘경(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성민(聖民)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서익(瑞翼)이며, 어머니는 심종민(沈宗敏)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생원이 되고,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 정언·교리·부수찬·헌납 등을 지냈다. 그 뒤 1649년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를 적발함에 있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1650년(효종 1) 이조정랑을 거쳐 1652년 동부승지에 승진하였고,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어 대사간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이조와 예조의 참판, 부제학·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약방제조(藥房提調)가 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삭직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1663년(현종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6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망하자 그가 나서서 엄정한 태도로 논리를 펴 반격하여 돌려보냈다. 이 일로 왕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 그는 또 성리학 (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하였고,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 등 명신들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순조 때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기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원은 마을 뒤쪽의 야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대지의 아래쪽에 동·서재가 있고 위쪽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특이하게 강당은 갖추어지지 않았다.
건물의 초입부터 먼저 입덕(入德)이란 문을 들어가면, 좌측에 권선(勸善)·우측에 보인(輔仁)이라는 숙사가 있다. 경행(景行)과 숭도(崇道)라는 문을 지나면 기천서원이라는 사액글귀와 모현사(慕賢祠)라는 건물이 나타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집인에 전면에는 개방된 퇴칸이 있고 내부에는 김안국·이언적·홍인우·정엽·이원익·이식·홍명구·홍명하의 순으로 위패가 일렬로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