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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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암서원(龜巖書院)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 1동 산79-1
   서 침(徐 沈) 서거정(徐居正) 서 성(徐 渻) 서사원(徐思遠) 서 해(徐 嶰)
   1665년(현종 6)
   
   음력 9월 1일
   구암서원숭현사(龜岩書院崇賢祠)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2호(1982.03.04지정)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에는 연구산(현. 제일여중)에 있었으나 이후 1675년(숙종 원년) 3월 29일 유림에서 서침(徐沈)을 봉안(奉安)하고 매년 제사 지내다가 1718년(숙종 44)에 대구시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移建)한 것이다. 그와 함께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고, 1741년(영조 17)에 서성(徐渻), 1757년(영조 33)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으며 2008년 8월 27일(음) 유림의 총의에 의해 서사원(徐思遠)을 추향(追享)하게 되었다.

서침(徐沈)은 세종이 달성서씨 세거지로 사용하는 달성(현 달성공원)의 지형이 두형같고 주위가 천연적으로 높은 성벽으로 이루어 명승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남산고역(전 남산병원 일대)과 바꾸도록 하는 한편, 대대로 세록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자 서침의 뜻에 따라 대구 지방 일대에 거둬들인 환곡의 이자를 감해주기로 하였다 한다. 이에 은덕(恩德)을 입은 대구지방(영남유림) 주민들이 서침의 송덕(頌德)을 기리기 위하여 구암서원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구암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세우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講堂)을 증수(增修)하였다. 1974년에 보수하였다. 그 후 숭현사는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수차례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1995년도에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1동 산79-1번지 연암공원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1)서침(徐沈, 1365년경~)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균형(鈞衡)이며, 어머니는 승동정(承同正) 이영유(李永儒)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

세종대에 서씨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경상도지역의 요새가 되므로 다른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포상 대신에 환자〔還上〕의 모곡(耗穀 : 세곡을 되돌려 받을 때 운반이나 동물의 해로 손실되는 양을 추가한 양)을 감하여줄 것을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인근주민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등이 하사되었고, 관료로 탁용되게 되었다. 그 결과 1433년(세종 15)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다음 해에 전라도처치사가 되었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2)서거정(徐居正,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익진(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미성(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 赤壁賦>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 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 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 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 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 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연주시격언해 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동인시화 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동인시문 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우리 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 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했는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 ≪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 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 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 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서해(徐嶰, 1537~1559)

조선의 학자. 자는 정지(挺之), 호는 함재(涵齋), 예조참의(禮曹參議) 고(固)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 20세에 이미 문장·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나 오래 살지를 못하였다. 대구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4)서사원(徐思遠,1550~1615)

자(字)는 행보(行甫), 호(號)는 낙재(樂齋), 시(諡)는 문강(文康)

유일(遺逸)로써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고 선생은 부(父) 진사공 형(浻)의 명을 받들어 채상사(蔡上舍) 응린(應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글을 외우고 익힘이 총명하고 사장(詞章)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날로 칭송이 더하였으며 관년(冠年)이 되어서 사서(史書)에 익숙하고 시문(時文)에도 능하였다. 서낙재(徐樂齋)선생은 1550년(명종5년, 경술)에 팔거현(八筥縣)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여1615년(광해7년, 을묘)에 별세한 학자이고, 의병장이며 평생 교화(敎化), 덕행(德行), 효행(孝行)으로 달성십현(十賢)의 한 분이시다.본관(本貫)은 달성(達成)이고 흡(洽)(1527~1593)의 아들이며 달성군(達成君) 영(穎)의 후손으로, 7세때 진사 연정선생 백부 형(浻)(1524~1575)에게 입양했다. 대구남산에서 을해(1575년 선조8년) 선고별세(先考別世) 후 이천선영(伊川先塋)에 시묘생활을 한 뒤 이천으로 자리 잡았다. 1572년(선조5년, 임신) 오산(熬山)에서 5~6월 여름 50일 동안 산사(山寺)등에서 고문(古文), 고시(古詩) 및 당송(唐宋)의 시(詩)를 공부 시부(詩賦)를 짓는 수업에 참여 하였다. 그 후에는 정한강(鄭寒岡), 김동강(金東岡) 선생의 사우(師友)이시다. 주자학(朱子學)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이후에는 후진(後進) 양성에 힘썼다. 1575년(선조8년,을해)에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개연히 구도(求道)의 뜻을 가졌다. 1584년(선조17년, 갑신)에 학행으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사임했으며, 1595년(선조28년, 을미)에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3년간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17년간 개령(開寧), 옥과(玉果), 연기(燕岐)의 현감, 형조, 호조의 정랑(正郞), 역학교정(易學校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아니하였다. 학문적으로 장여헌(張旅軒), 손모당(孫慕堂), 최수우당(崔守愚堂), 조대소헌(趙大笑軒), 박대암(朴大庵), 정우복(鄭愚伏) 등과 교류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공산성(公山城)에서 창의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회맹에 참가하였다. 평생 교화(敎化)로 정사학규(精舍學規)를 만들어 학도들에게 학문을 연마하는 방법과 몸을 닦는 규범(規範)을 제정하여 평생실행(平生實行) 할 수 있도록 강학(講學)하셨다. 문하생(門下生)이 180명이 있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2008년 8월 27일(음) 봉안 고유)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임란호국중의단 등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문집(文集)은 낙재집(樂齋集) 7권(卷), 일기(日記), 연보(年譜) 등 6책이 있으며, 2008년 6월 4일 (양)대구동방한문학회 주최로 국역낙재선생문집(國譯樂齋先生文集) 4권(卷)과 국역낙재선생일기(國譯樂齋先生日記) 1권(卷)의 발간 기념회를 가졌다.

 

5)서성(徐渻, 1558~16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팽소(彭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고(固)이고, 아버지는 해(嶰)이다. 어머니는 좌의정 이고(李股)의 딸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 예문관의 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병조정랑·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해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 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평양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 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 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경북서원지, 20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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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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