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김굉필(金宏弼) 정 구(鄭 逑)
   1568년(선조 1)
   1607년(선조 4)
   음력 2월, 8월 중정(中丁)
   사적 제488호(2007.10.10지정)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 -보물 제350호(1963.01.21지정)

도동서원은 조선 5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향사한 서원으로1568년(선조원년) 지방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는데 창건5년 뒤인 1573년(선조 6)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4년(선조37)에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렀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1607년(선조 40)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도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 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1)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중곤(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중곤(中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소형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경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 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 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이장길(李長吉)·이적(李勣)·최충성(崔忠誠)·박한삼(朴漢參)·윤신(尹信)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2)정구(鄭逑, 1543~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딸이다.

6대조 총(摠)과 그 아우인 탁(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둘째 형인 곤수(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였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

1603년 ≪남명집 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송원기(宋遠器)·손처눌(孫處訥)·한준겸(韓浚謙)·문위(文緯)·장흥효(張興孝)·이윤우(李潤雨)·허목(許穆)·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복서(卜筮)·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1573년 ≪가례집람보주 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한 이래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심의제조법 深衣製造法≫·≪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오복연혁도 五福沿革圖≫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으며, 이황의 예에 관한 서신을 모은 ≪퇴계상제례문답 退溪喪祭禮問答≫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예학은 국가례(國家禮)와 사가례(私家禮)를 하나의 체계 속에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주자의 총체적인 예학을 추구하였다. 동시에 왕례(王禮)와 사례(士禮)의 차별성을 강조해 17세기 예학의 한 경향인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의 단초를 열었다.

이는 ≪의례경전통해 儀禮經傳通解≫의 체재를 모범으로 하고 사마광(司馬光)·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자 등의 예설을 바탕으로 해 가(家)·향(鄕)·방국(邦國)·왕조례(王朝禮)를 복원한 ≪오선생예설분류≫에 잘 나타나 있다.

읍지에도 관심이 많아 1580년 ≪창산지 昌山誌≫를 편찬한 이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거의 예외 없이 읍지를 편찬해 ≪동복지 同福志≫·≪관동지 關東志≫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하였다.

특히 ≪영가지 永嘉志≫·≪평양지 平壤志≫ 등의 편찬에도 관여해 후대의 읍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咸州志≫ 하나 뿐이다. 읍지 편찬의 목적은 생민(生民)도 있었지만 풍속의 순화와 교육, 즉 교화에 주안점이 있었다.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부분으로 경전 가운데 특히 ≪심경 心經≫을 중시하였다.외출할 때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주된 교재였다 한다.

1603년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비판한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저술했는데, 육구연(陸九淵)의 입장을 반영한 정민정의 설을 모두 삭제하고 이정(二程, 정이, 정호)과 주자의 설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심경≫은 경(敬)을 요체로 하는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잘 제시한 책으로 16세기 후반 이후 영남 퇴계학파의 하나의 학문적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이외에 역시 이황의 저술인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를 분류해≪개정주자서절요총목 改定朱子書節要總目≫을 편찬했으며, ≪성현풍범 聖賢風範≫·≪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염락갱장록 濂洛羹墻錄≫ 등의 성리서를 저술하였다.

역사서로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의 영향을 받으면서 연표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를 정리해 뒤에 나타나는 정통론과 강목체 사서와의 매개 역할을 한 ≪역대기년 歷代紀年≫과 역대 인물들의 정리와 평가의 성격을 지닌 ≪고금충모 古今忠謨≫·≪치란제요 治亂提要≫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문학서로서는 ≪고금회수 古今會粹≫·≪주자시분류 朱子詩分類≫ 등을 편찬했으며, 의학서로는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집에 소장한 의학서에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뽑아 정리한 ≪광사속집 廣嗣續集≫ 등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은 퇴계학파의 주자를 기반으로 한 학문적 전통과 서경덕·조식학파의 박학(博學)의 전통을 계승한 결과였다. 근기남인 실학파의 탈주자학적 사상의 뿌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서경덕·조식에 있었는데 그는 이 한 부분을 전달해주는 교량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도동서원은 1604년(선조 37)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서원은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있으며, 통로와 계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軸)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구성과 배치형식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으로서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물들의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구성 및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石物)들도 그 기법이 우수하다.

 

1)강당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2)사당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3)동·서재

강당인 중정당과 더불어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는 동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서재인 거의재(居義齋)는 모두3량 구조로 간결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2칸의 온돌과 1칸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4)수월루(水月樓)

서원으로의 진입공간으로 사용되는 문루인 수월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고자가 개좌와 파좌를 외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로 되어있다. 누하에 출입문을 설치하였고 누상에는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현재 하사제기(下賜祭器)와 경현록(景賢錄) 판각이 보관되고 있다.

도동서원에는 하사서적인 춘추 10책,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篇) 5책, 경현록(景賢錄) 3책, 규장전운(奎章全韻) 등 8종 24책과 경현록, 성화16년경자3월토3일사마방목(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 점필재김선생문도록첨간변파록, 점필재선생문인록 등을 비롯한 책판 8종 68점 등이 있었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위탁 관리 중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경북서원지, 20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http://www.cha.go.kr/

대구광역시 달성군청 http://culture.dalseong.daegu.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