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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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귀강서원(龜江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 2동(지천)
   김 담(金 淡) 김 륵(金 玏) 박승임(朴承任) 김영조(金榮祖)
   1615년
   
   
   
1615년 영천(榮川 : 영주의 옛 이름)의 사림들이 백암 김륵(栢巖 金玏)과 죽유 오 운(竹牖 吳澐)에게 물어 세종조의 뛰어난 학자였던 문절공 김담(文節公 金淡)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 김 담의 고택) 동쪽 구성산 아래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우고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의 위패를 함께 봉안 하였다. 봉안문은 망와 김영조(忘窩 金榮祖)가 짓고 상향문은 학호 김봉조(鶴湖 金奉祖)가 지었다. 1621년(광해 13) 민절공(敏節公) 백암 김륵의 위패를 추향하였다. 추향시 봉안문과 상향문은 군수 성서 이상언(城西 李尙彦)이 지었다. 1669년(현종 10) 망와 김영조의 위패를 추향하여 모두 4위를 향사 하였다.
1749년(영조 25) 지천대로 이건하고, 1767년(영조 43) 귀강서원(龜江書院)으로 승격하여 묘우를 상현사(象賢祠), 강당을 입교당(立敎堂), 동재를 극복재(克復齋), 서재를 존성재(存省齋)라 하였다. 이건기(移建記)는 나학천(羅學川)이 짓고, 입교당 중수기는 귀와 김굉(龜窩 金㙆)이 썼다.
춘,추 3월 상정(상정)과 9월 상정에 제향하였으나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고 복설되지 못하였다.
현재 영주전문대학 구내에 귀강서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김담(金淡 1416~1464)
본관은 예안(선성, 禮安, 宣城)이며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다.
아버지는 현감 소량(小良)이며 어머니는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딸이다.
1416년 영주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에서 태어나 1435년(세종 17) 형 증(曾)과 함께 문과 정시에 함께 급제하여 형제가 모두 집현전(후에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었다.
1437년(세종 19년 22세) 집현전을 설치한 세종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서 강론을 담당할 문학에 밝은 선비 10인을 선발할 때 형인 김 증과 함께 선발되어 집현전 저작랑이 되고 이듬해 1439년에 정7품 집현전 박사가 되었다. 나이 25세에 집현전 학자들과 더불어 국어와 음의(音義)를 보정해 올리고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가 되었고, 이듬해 정인지, 이순지, 박윤장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양전을 시행했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년 32세). 문과 중시(重試)에 1등 제2인으로 급제하고 승문원 부교리 임명을 받아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찬정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집현전 직제학, 안동 부사, 예조 참의, 경주 부윤 등을 거쳐 이조 판서에 올랐다.
그는 세종대왕 당시의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정인지·정초·정흠지·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칠정산외편》·《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대통력일통궤 大統曆日通軌》·《태양통궤 太陽通軌》·《태음통궤 太陰通軌》·《교식통궤 交食通軌》·《오성통궤 五星通軌》·《사여전도통궤 四餘纏度通軌》·《중수대명력 重修大明曆》·《경오원력 庚午元曆》·《선덕십년월오성릉범 宣德十年月五星陵犯》등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편찬하였다.
형인 김증(金曾)도 역시 집현전의 학자로 동국정운(東國正韻), 역대병요(歷代兵要)의 편찬에 관여 하였다.
안평대군, 성삼문 등 당시 집현전 학사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시(讚詩)가 기록되어 있다.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며 영주의 귀강서원, 순흥의 단계서원(丹溪書院)에 배향되었다.
 
2)박승임(朴承任, 1517~1586)
조선 명종, 선조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 자는 중포(重圃), 호는 소고(嘯皐)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에 이조 좌랑, 사간원 정언, 현풍 현감, 진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엮임하였다.
윤원형(尹元衡, ?~1565)의 전횡이 심할 때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퇴계의 학풍을 후대에 계승하였으며, 사후 경상도 영주의 귀강서원에 배향되었다.
 
3)김륵(金玏, 1540~1616)
본관은 예안(선성)이며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 시호는 민절공(敏節公)이다. 세종조의 집현전 학자로 이조판서를 지낸 문절공(文節公)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의 현손으로 1540년 문단 백암촌에서 출생하였다.
18세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1573년에는 영주 이산서원에 원장이 되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1574년에 사액을 받았으니 이는 도산서원과 같은 해이기는 하나 퇴계 선생이 배향된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선조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록에 올랐으며 영월군수에 부임하여서는 먼저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배알하고 제청, 제실, 찬청을 건립, 노산군(魯山君)이란 호칭을 처음으로 신주에 써서 송씨 부인과 함께 신위를 모셨다. 또한 피폐한 영월의 민생을 모두 혁파하니 절로 풍년이 드는 상서로운 일이 있어 임기가 끝날 때는 군민들이 모두 부모를 잃은 듯 울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 안집사(嶺南安集使)의 명을 받아 부임하였으나 이미 수 십 고을이 왜적에게 점령되었고 수령과 병력은 도망치고 흩어졌으며 백성은 유랑하여 조정의 뜻이 미치지 않았다. 이에 공(公)은 초모문(招募文)을 지어 조정의 뜻이 있음을 알리고 흩어진 백성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수령을 임명하여 함께 전쟁을 치르며 환란을 수습하니 비로소 공(公)으로 하여금 조정의 명령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1594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1595년 부제학이되어 전란의 수습과 국정의 요체를 담은 시무16조(時務十六條)를 올린 후 체찰사(體察使)로 전국을 돌며 전선을 독려하고 대비책을 세웠다. 161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력으로 왜적의 재침에 대한 출병과 일본에 칙서를 보낼 것을 약속받았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다.
1604년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임할 시, 큰 홍수로 낙동강과 반변천 제방이 유실되어 성내가 모두 침수되고 매몰되었는데 공(公)이 안동부는 영남의 요충이라 설득하여 이웃 고을의 장정들까지 동원하고 공(公)의 녹봉까지 모두 지원하여 제방을 축조하였으니 현재 안동시의 낙동강 제방은 당시에 축조된 것이다. 이때 퇴계 선생을 모신 여강서원(廬江書院)도 함께 유실되었는데 역시 유림의 부로들과 상의 새롭게 옮겨 중건하였다.
광해군2년 대사헌으로 재임되어 기축옥사(己丑獄死)에서 억울하게 죽은 절신들을 신원시키고 조선 5현신(鄭汝昌, 金宏弼, 趙光祖, 李彦迪, 李 滉)의 문묘 배향을 여러차례 주청하여 실현되게 하였다.
벼슬은 삼사의 장관(大司諫, 大司憲, 副提學)을 모두 지내고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광해군이 생모를 공성황후로 추숭한 후 건립한 봉자전(奉慈殿) 행사의 부당함을 직언하다가 장차 큰 화를 당할 위기였으나 여러 대신들의 극력 변호로 삭탈관직만 되어 고향 영주로 돌아왔다. 포의필마로 귀대(龜臺)와 천운정(天雲亭)을 왕래하며 자적하다가 광해8년(1616년)에 77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광해12년(1620년) 사림의 발의로 고조부 문절공 김담(金淡)과 소고 박승임(朴承任)과 함께 영주 귀강서원(龜江書院)에 배향되었다.
인조대왕은 즉위한 후 친히 예관으로 망와 김영조를 보내 치제하였고 효종4년(1653년)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정조12년(1788년)에 민절공(敏節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4)김영조(金榮祖, 1577~164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아버지는 현감 대현(大賢)이며 학봉 김성일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임금이 오미동(五美洞)이라 불렀다.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상현사(象賢祠): 四賢을 모신 사당.
입교당(立敎堂):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강학 하던 곳(강당)
극복재(克復齋): 동재로서 유생의 기숙처.
존성재(存省齋): 서재로서 유생들의 기숙처.
주사(廚舍): 서원 수호인이 거쳐하던 곳.
고방(庫房): 서원 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 하던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