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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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타양서원(陁陽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3
   손홍량(孫洪亮) 김자수(金自粹) 유중엄(柳仲淹)
   1741년(영조 17)
   
   3월 중정(中丁)
   
1741년(영조 17)에 손홍량(孫洪亮), 김자수(金自粹), 류중엄(柳仲淹)을 제향하기 위해 설립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일직 송리 뒷산에 단(壇)을 쌓아 제향하여 오다가 1984년 사림에 의해 복설되어 매년 3월 중정(中丁)일에 제향하고 있다.

1)손홍량(孫洪亮, 1287~137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일직(一直). 본래의 성은 순씨(荀氏)였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그것을 피해 5대조 응(凝) 때 손씨로 고쳤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충혜 양조에 벼슬하고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49년(충정왕 1)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51년 치사(致仕)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으로 왕이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할 때 중도에서 평복으로 왕을 맞아 치하를 받았다.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서 왕으로부터 궤장(几杖)과 자신의 초상화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 등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2)김자수(金自粹, 1351~141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자수(子粹).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오(珸)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에 제수되었다.
우왕 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 때에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3)유중엄(柳仲淹, 1538~157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문(景文)·희범(希范). 호는 파산(巴山). 안동 출신. 아버지는 참봉 공계(公季)이며, 생부는 참봉 공석(公奭)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응삼(應參)의 딸이며, 부인 영천이씨는 이현보(李賢輔)의 증손녀이다.
약관의 나이에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종질 유운룡·성룡과 함께 동문수학하였다. 이황에게 성인의 말씀가운데 일생토록 행할 만한 치심(治心)·행기(行己)의 요점을 질문하여 스승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황은 황준량(黃俊良)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지취(志趣)와 견식을 크게 칭찬하고 후일 큰 학자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후 성주목사로 부임한 황준량은 그를 특별히 초청하여 오건(吳健)·정구(鄭逑)와 함께 주자서(朱子書) 강론하기도 하였다. 정구는 그를 일생의 외우(畏友)로 대우하였으며, 안동부사로 부임해서는 산소를 성묘하고 제문을 지어 그의 고매한 인품과 호학의 기질을 칭송하였다.
이후 그는 남치리(南致利)와 더불어 이황문하의 안자(顔子)로 평가되었으며, 풍산유씨 유운룡·성룡가문의 가학연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안동의 타양서원(陁陽書院)과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파산유고 巴山遺稿≫가 있다.

서원의 경내는 평지로 되어 있고, 외삼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동재와 강당이 위치한다. 사당은 경내의 좌측 뒤편에 영역을 만들었으며, 강당의 후원에 넓은 공터가 남아 있다. 외삼문 밖에는 고직사로 쓰이던 건물들이 있으나, 지금은 개조가 많이 이루어지고 외부인들이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당은 상현사(尙賢祠), 강당은 성경당(誠敬堂), 동재는 진수재(進修齋), 대문은 경앙문(景仰門)이다. 서재(西齋)는 마련되지 못했다.
상현사는 묘우로서 주향인 손흥량과 배향인 김자수 및 류중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전사청은 향사 때에 사용할 제물을 보관하는 곳이며 동재인 진수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곳이다. 성경당은 강당으로서 중앙의 마루와 양쪽의 협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사의재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숭모재이다. 이곳은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 서원의 대문에는 경앙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