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이 황(李 滉) 조 목(趙 穆)
   1561년(명종 16)
   1575년(선조 8)
    2월, 8월 중정(中丁)
   사적 제170호(1969.05.28지정) 상덕사-보물 제211호(1963.01.21지정)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1963.01.21지정)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792년(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리고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시행하였다. 1796년(정조 20) 시사단(試士壇)을 세우고, 1819년(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하였다.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되었으며, 1930년(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증건(增建)하였고 1932년(임신년) 하고직사(下庫直舍) 이건하였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조목(趙穆, 1524~160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 대춘(大春)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효심이 지극해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대과(大科)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출생, 성장하면서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이황이 죽은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했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해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다.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했고, 경학을 연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心學)에 심취해 ≪심경 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귀향할 때마다 역동서원(易東書院)·도산서원을 참배,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그의 일생의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 그리고 스승으로 받들어 모심에 있다 하겠다. 그의 문집에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 困知雜錄≫이 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상덕사-보물 제211호(1963.01.21지정)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74년(선조 7)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은 상덕사를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앞면 기둥은 계단 높낮이 때문에 다른 기둥보다 길이가 길다. 정문 양옆으로 사당 주위를 둘렀던 토담은 1969년 보수공사 때 돌담장으로 모두 바꾸었다. 간결하고 매우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시대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2)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1963.01.21지정)
이 전교당은 1574년(선조 7)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3)도산서당
도산서당은 3칸 크기의 건물로 좌측으로부터 골방이 딸린 부엌, ‘완락재(琓樂齋)’라고 이름붙은 온돌방, ‘암서헌(巖棲軒)’ 현판이 걸린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맞배로 꾸몄는데, 우측에 평상모양의 툇마루를 연결하면서 지붕을 이어 붙인 것이 특이하다. 마루에서 보면 앞쪽으로 연당을 조성하여 주변과 식재를 하고 연당과 맞닿은 담장은 개방하여 외부 자연 경관과의 연결을 통해 대청에서의 느낌을 극대화 하였다. 연당의 이름은 정우당(淨友塘)이다. 대청에서 방으로의 출입문도 다른 집에서는 보기 힘든 모양으로 삼분합 들어열개문으로 만들었는데, 중앙의 것만 창호지를 바른 세살문으로 나머지는 판문으로 되어 있다.
 
4)광명실
진도문으로 들어서기 전 좌우에 동서 광명실(光明室)이 위치해 있는데, 지형에 따라 누각형식으로 세워진 장서고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사방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지붕은 맞배로 하였으며, 단청을 하고 하부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광명실은 임금이 하사한 서적과 퇴계선생이 보던 서적, 그리고 제자들의 문집을 모아 놓은 건물이다. 동광명실은 1819년(순조 19)에 지었고, 서광명실은 1930년에 동광명실과 같은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5)동·서재
강당의 전면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하였다. 앞의 반칸은 툇마루로 꾸미고 방은 2칸과 1칸으로 나누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고 이름지었다.
 
6)농운정사
1561년에 지은 농운정사(隴雲精舍)는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으로 ‘工’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에는 ‘관란헌(觀瀾軒)’·‘시습재(時習齋)’·‘지숙요(止宿寮)’의 현판들이 붙어 있는데, 서남쪽의 관란헌은 휴식공간, 시습재는 학습공간, 지숙요는 기거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평면이 매우 특이하며, 문과 창호도 기능과 모양을 고려하여 매우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7)고직사
고직사는 상하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고직사는 강당영역의 서쪽에, 하고직사는 ‘ㅁ’자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두고 아래로 부엌과 고방들이 이어져 가운데 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하고직사는 ‘ㄷ’자형 평면으로 2칸의 대청 좌우에 방을 연결하고 아래에 부엌을 두었으며, 전면이 개방된 형식이다.
 
8)기타
강당의 동쪽에 문집 책판이 보관되어 있는 장판각이 있는데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이다. 가운데칸의 출입문만 쌍여닫이 세살문으로 하고 좌우에는 판문을 달았다. 사당의 서남쪽에 전사청을 두었는데 2동의 건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쪽은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로, 서쪽은 주청(酒廳)으로 사용되었다. 각각의 건물이 한칸은 마루로, 한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의 건물은 마루 대신 전돌로 꾸며져 있다.

도산서원 동광명실에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