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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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금오서원(金烏書院)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276
   길 재(吉 再) 김종직(金宗直) 정 붕(鄭 鵬) 박 영(朴 英) 장현광(張顯光)
   1570년(선조 3)
   1575년(선조 8)
   음력 3월, 9월 중정(中丁)
   경상북도기념물 제60호(1985.10.15지정)
이 서원은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0년(선조 3)에 지었다. 금오산(金烏山)에 처음 지었으며 1570년(선조 8)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02년(선조 35) 부사 김용(金涌)에 주도하여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장현광이 「금오서원중건봉안문(金烏書院重建奉安文)」을 지었다.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사액을 받고 중수하였다. 이때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을 추향하고 이후 장현광(張顯光)을 추배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1)길재(吉再, 1353~1419)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학자.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 (金希迪)의 딸이다.
11세에 처음으로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웠고, 18세에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의 아문(衙門)에 나아가서 ≪논어≫와 ≪맹자≫ 등을 읽고 비로소 성리학을 접하였다. 또한 아버지를 뵈려고 개경에 이르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며 비로소 학문의 지론(至論)을 듣게 되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9)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해 그 해 가을에 청주목사록 (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李芳遠)과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오가며 강마(講磨)해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1387년에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 이듬해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되었다. 그 당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太學)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양반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 1)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해 봄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에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교수(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菜果)와 해장(醯醬) 따위를 먹지 않고 3년 상을 행하였다.
그가 어머니를 효성을 다해 봉양하니 아내 신씨(申氏)도 그 뜻을 본받아 옷가지를 팔아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었다. 군사(郡事) 정이오 (鄭以吾)가 이러한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오동동(梧桐洞)의 묵은 밭을 주어서 봉양에 쓰도록 하였다.
1400년(정종 2) 가을에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왕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그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군사 이양(李楊)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田園)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려보냈다.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항상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고 영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다.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67세로 죽으니, 후일 세상 사람들이 그를 기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했고,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었다. 저서로 ≪야은집≫·≪야은속집 冶隱續集≫이 있고, 그의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 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 시호는 충절 (忠節)이다.
 
2)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瓊)·계온(季訪), 호는 점필재(佔畢齋).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해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은 문장가로서 그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紛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정붕(鄭鵬, 1467~1512)
조선 전·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선산 출신. 희언(希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由)이고, 아버지는 현감 철견(鐵堅)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지평·정언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무오사화·갑자사화로 많은 사림파가 주살(誅殺)을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정승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洪景舟)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죽었다.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 성희안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안상도 案上圖≫를 지어 자경(自警)하였으며, 성리학자인 박영(朴英)이 그의 문인이다.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
 
4)박영(朴英, 1471~154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철손(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지(祗)의 딸이다.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유인숙(柳仁淑)의 모함으로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났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의술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경험방 經驗方≫·≪활인신방 活人新方≫·≪백록동규해 白鹿洞規解≫ 등이 있다.
 
5)장현광(張顯光, 1554~163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구미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肋)에게 배웠고, 18세 때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 (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岩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읍청루, 정학당(正學堂), 내삼문(內三門), 상현묘(尙賢廟)를 일직선으로 두었으며 정학당의 앞에는 동·서재(齋)를 전학후묘의 형식에 따라 배치하였다.
 
1)사당
사당인 상현묘(尙賢廟)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5량형식의 가구구조로 전면의 공포부분은 출목이 있는 익공형식으로 되어 있다. 전면 3칸에는 매칸마다 2짝씩의 널문을 설치하였으며, 기단은 자연석으로 마감하고 양단부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2)강당
강당인 정학당(正學堂)은 중앙의 3칸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5량 형식의 가구구조이다. 양 협실의 전면으로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대청 후면 3칸에 영쌍창이 설치되어 옛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동재·서재
정학당과 더불어 강학공간인 동·서재는 모두 3량 구조로 간결한 형식이며 동재는 3칸 모두 온돌방으로 꾸미고 서재는 2칸의 온돌과 1칸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4)읍청루
서원으로의 진입공간으로 사용되는 문루인 읍청루(邑淸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로 되어 있다. 누하에 출입문을 설치하였고, 누상에는 서원 쪽은 개방하고 외부는 창을 두어 반개방적 성격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서원 중수 당시 부사였던 김용의 업적을 기긴 공적비 1기가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구미시 문화관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