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산서원(玉山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이언적(李彦迪)
   1572년(선조 5)
   1574년(선조 7)
   8월 중정(中丁)
   사적 제154호(1967.03.08지정) 이언적 수필 고본일괄-보물 제586호(1975.05.01지정) 삼국사기<권50>-보물 제525호(1970.12.30지정)
이 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하고 후진(後進)을 교육하기 위해1572년(선조 5)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임금이 서원이름을 내렸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각 건물들의 건축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에서 북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書齋)였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1)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 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해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여기에서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러 개 남겼다. ≪구인록 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 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던 것이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 태도에 비해 매우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그의 미완성 절필이다. 이 저술도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의 9경(九經:修身·尊賢·親親·敬大臣·體群臣·子庶民·來百工·柔遠人·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 저술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한 저술이요, 뒷날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 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 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 근본의 일강령은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27세에 지은 <오잠 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들고 있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 (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기숙사인 동재(東齋, 민구재, 敏求齋)와 서재(西齋, 암수재, 闇修齋),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 어서각(御書閣) 장서각인 청분각(淸芬閣)과 회재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건물 곳곳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석봉(石峯)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의 명필이 쓴 현판들이 있다.
 
1)사당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는 강당의 후면에 위치한 내삼문을 지나 자리잡고 있다. 맞배지붕에 초익공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3량가 가구구조이며, 겹처마로 지붕을 마감하였고, 문은 전부 판문을 사용하였다.
 
2)강당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에 초익공양식이다.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겹처마로 처마 끝에 활주를 세웠다. 5량가 가구구조이며, 평면배치는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3칸은 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단은 장대석을 쌓아올려 만들었으며, 초석을 원형이 아닌 치석된 각형을 사용하였다.
 
3)동·서재
동재인 민구재(敏求齋)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초익공형식이다. 전면에 원기중을 사용하였으며, 홑처마로 마감하였다. 평면배치는 남측 1칸과 북측 2칸을 사이로 마루를 2개 두었으며, 또한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서재인 암수재(闇修齋)는 동재와 형식이 같으며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초익공형식이다.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홑처마로 마감하였다. 평면배치는 남측 1칸과 북측 2칸을 사이로 마루를 2개 두었으며, 또한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4)무변루
서원의 정면에 자리 잡고 있는 무변루(無邊樓)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5량가 가구구조이고,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마감하였으며, 초익공양식을 취하였다. 평면배치는 양 옆에 방을 두고 가운데는 마루를 두었으며, 양 옆의 방으로 1칸씩 마루를 설치하여 좌우로 방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5)경각
경각(經閣)은 문서나 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사당의 서측 편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초익공양식을 취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로 마감하였으며,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6)고직사
고직사는 서원의 관리자가 살던 곳이며, 전체적으로 ‘ㄴ’자형의 배치를 하고 있다. 3량가 가구구조를 하고있으며, 맞배지붕에 홑처마로 마감하였고, 민도리양식이다.
 
7)기타
사당의 서측 편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있으며, 고직사의 후면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집판각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원의 맨 서측 담장바깥으로 청분각이 건립되어 위치하고 있다.

옥산서원에는 고문서 1,156건, 고문헌이 943종 3,977책, 책판이 1,123장이 소장되어 있다. 고문헌은 김부식이 저술한
참고-경상북도서원지
문화재청
경주시 문화관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