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한국의 9대서원 - 남계서원


 
작성일 : 12-09-16 14:19
동계집(동계 정온의 문집)에 나타난 남계서원 제문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693  


동계집 부록 제2권



남계서원(灆溪書院) 제문

 
대들보가 한 번 무너지니 / 樑木一頹
우리의 도가 쇠퇴하리라 / 吾道衰矣
대상의 시기 다시 이르매 / 祥朞再臨
위의 있는 모습 멀어지니 / 儀形邈矣
아아 애통하도다 / 嗚呼痛哉
무릇 우리의 선비들은 / 凡我士類
누구를 우러르며 의지할까 / 焉仰焉依
소자들이 이곳으로 달려와 / 小子來斯
서로 마주하여 통곡하나니 / 相向而慟
아아 애통하도다 / 嗚呼痛哉
흠향하소서 / 尙饗
 
 
[주D-001]대들보가 한 번 무너지니 : 선생을 잃은 슬픔을 표현한 말이다. 공자가 장차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서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쓰러질 것이다.”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듣고서 “장차 누구를 우러를 것이며, 장차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남계서원 봉안문(奉安文) 임오년(1642, 인조20)

 
생각건대 우리 선생께서는 / 惟先生
집안에서 정치를 행하자 / 爲政于家
효우가 절로 이루어졌고 / 孝友天成
충성을 나라로 옮겨서는 / 移忠於國
곧은 도로써 실행하였네 / 直道以行
이륜을 부지하고 펼침은 / 扶敍彝倫
시종 선생께 힘입었으니 / 允賴始終
태산북두처럼 우러름은 / 星斗之仰
원근이 모두 마찬가지네 / 遠邇攸同
하물며 우리 함양 지방은 / 矧惟咸邑
외가가 있는 고을인지라 / 渭陽之鄕
선생의 풍성을 입은 것이 / 衣被風聲
어느 곳보다 큼에 있어서랴 / 實弘此彊
이에 위패를 봉안하려 하나 / 爰謀揭虔
따로 사당을 세우기 어려워 / 有難別構
뇌송과 별묘를 함께 하니 / 合堂㵢松
제향함이 구차하지 않네 / 與享非苟
문헌공에게 의귀하였으니 / 依歸文獻
원하던 바를 따른 것이고 / 志願是遵
덕이 있어 이웃이 있나니 / 德旣有隣
의지해도 친함을 잃지 않으리 / 因不失親
정령은 마땅히 편하실 것이고 / 精靈宜妥
후학은 공경할 곳이 마련되니 / 矜式有地
바라건대 선철을 이어서 / 尙紹先哲
길이 후생을 계도하소서 / 永啓後士
 
 
[주D-001]뇌송(㵢松) :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과 송암(松庵) 강익(姜翼)을 지칭한다.
 
 
동계집 부록 제2권



남계서원 승향문(陞享文) 정사년(1677, 숙종3) 8월 13일

 
하늘이 사문을 도와주어 / 天佑斯文
근원이 끊어지지 않았네 / 不絶注邍
선생께서 분연히 일어나실 때 / 先生奮起
기운은 넓고 행실은 돈독했네 / 氣浩行敦
예로써 나아가고 의로써 물러나니 / 進禮退義
성인을 본받으려는 학문이었고 / 希聖之學
일신을 돌보지 않고 경륜했으니 / 盡瘁經綸
강대한 기세로 우뚝 일어섰다네 / 剛大特立
인륜이 막혔다가 다시 펼쳐지고 / 倫斁而敍
나라가 오랑캐에서 중화가 되니 / 邦夷而夏
우주에 동량이 되어 지탱시키고 / 棟樑宇宙
긴 밤에 일월이 되어 밝힘이라네 / 日月長夜
남긴 풍모는 나부를 일으켜서 / 遺風立懦
만세가 영원히 힘입을 것이지만 / 萬世永賴
높은 산처럼 크게 우러름은 / 高山景仰
우리 고을이 가장 성대하네 / 鄙邦爲最
이에 비로소 위패를 모시어 / 始爰揭虔
향사의 별묘에다 봉안했더니 / 妥我鄕祠
덕이 있으면 고립되지 않는 법 / 德有不孤
오래 봉안함이 마땅치 않을 터 / 久安匪宜
공론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 公論攸激
사림에서 일제히 일어나서 / 士林齊起
문헌공에 배향하기를 주청하니 / 請配文獻
특별히 성상의 교지를 받았네 / 特蒙聖旨
이에 제향하는 예법으로 인하여 / 玆因享禮
위패를 서원으로 올리려고 하니 / 式將陞位
도의는 전현 후현과 짝이 되고 / 道配前後
제향에는 위차가 있게 되었네 / 俎豆有次
바라건대 이곳에 강림하시어 / 庶我歆格
우리의 문헌을 빛나게 하시고 / 熙我文猷
이제 지금부터 시작하여 / 自今伊始
영원히 아름답게 하소서 / 永孚于休
 
 
[주D-001]성인을 본받으려는 학문이었고 : 현인(賢人)의 학문을 말한다. 북송(北宋)의 주염계(周濂溪)가 말하기를, “성인은 하늘을 본받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본받기를 바라고, 선비는 현인을 본받기를 바란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 하였다. 《通書》
[주D-002]나부(懦夫) : 겁이 많고 나약한 사람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의 풍모를 들은 사람은, 완악한 사람은 청렴해지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세움이 있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 하였다. 《孟子 萬章下》
 
 
동계집 속집 제3권



부록(附錄)


남계서원(灆溪書院)의 상향문(常享文)

 
굳세고 큰 기운 타고났고 / 剛大之氣
학문으로 문채를 더하였네 / 文之以學
충성스런 절개에 격동되어 / 忠節所激
떳떳한 인륜이 부식되었네 / 彝倫迺植
이웃 고을도 향기를 입어 / 傍隣薰挹
경모함이 모두 마찬가지니 / 敬慕僉同
우리 지방 선비를 사랑하여 / 惠我邦士
영원 무궁토록 이르소서 / 昭格無窮
 
동계집의 저자
동계(桐溪  정온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정유명(鄭惟明)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거처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유배형)하였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이 서재용으로 지어준 두 칸의 집에서 지방 유생들을 가르쳤고, 지방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치고 애로를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유배된 송상인(宋象仁)·이익(李瀷)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을 때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비리와 병권 장악을 공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중시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함락당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 19)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높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이었다.
중국 은대로부터 남송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곤란과 우환을 당하여도 정도를 잃지 않았던 59인의 행적을 모은『덕변록(德辨錄)』과『동계집(桐溪集)』이 있다. 덕유산에 은거하며 『속근사록(續近思錄)』을 찬집하려 하였으나 끝마치지 못했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월 초하루 새벽에 「자경담」을 지었고, 「망북두시(望北斗詩)」와 「망백운가(望白雲歌)」를 통해서는 애군우국(愛君憂國)을 토로하였다.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668년(현종 9)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였으며, 이외에도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정온이 해배된 후 약 200년 뒤인 1842년(헌종 8) 대정현에 유배를 왔던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에게 청하여 대정현 막은골, 지금의 안성리에 송죽사(松竹祠)와 유허비를 세웠다.
1963년 대정 지역 칠성계가 중심이 되어 정온의 비석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에 있는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1977년에는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옮겼다. 정온의 생가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산리 50-1번지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자료 : 제주 행토문화대전